오랜만에 깊은 울림과 질문을 동시에 남긴 영화를 만났습니다. 에드바르트 베르거 감독(‘서부 전선 이상 없다’ 감독)이 로버트 해리스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만든 영화 '콘클라베'는 교황의 갑작스러운 선종 후, 새로운 교황을 선출하기 위해 바티칸 시스티나 성당에 모인 118명 추기경들의 이야기를 숨 막히게 그려냅니다.

세상에서 가장 비밀스러운 선거, 콘클라베
영화는 교황 선출 과정인 '콘클라베'를 중심으로 전개됩니다. 외부 세계와 완전히 차단된 채, 오직 추기경들만이 모여 투표를 통해 새로운 교황을 선출하는 과정은 그 자체로 흥미롭습니다. 마치 수능 출제 위원들의 합숙처럼, 엄격한 비밀 유지 속에서 여러 차례 투표를 거듭하는 모습은 신중함과 의사 존중의 극치를 보여주는 듯했습니다. 하지만 동시에, 과연 이것이 효율적인 방식인가 하는 의문도 들게 했죠. 로마 성전의 장엄한 아름다움과 붉은 제복을 입은 추기경들의 모습이 어우러진 영상미는 감탄을 자아냈습니다.
"확신하는 사람을 유의해야 한다" - 의심의 가치
영화의 중심에는 추기경단 의장으로서 콘클라베를 주관하는 로렌스 추기경(랄프 파인스 분)이 있습니다. 그는 혼란스러운 상황 속에서도 원칙을 지키려 애쓰지만, 유력 후보들의 숨겨진 비밀과 야망이 드러나면서 고뇌에 빠집니다. 특히 그가 던지는 "확신하는 사람을 유의해야 한다. 의심의 레이어가 있는 사람이 자격이 있다"는 대사는 제 마음에 깊이 와닿았습니다.
저 역시 세상을 살아가며 너무 쉽게 무언가를 확신하고 단정 짓는 태도를 경계하는 편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한계와 유한함을 지닌 존재이며, 이를 인지하고 끊임없이 의심하고 질문하는 과정 속에서 더 나은 방향을 찾아갈 수 있다고 믿기 때문입니다. 영화는 바로 이 '의심의 가치'를 묵직하게 보여줍니다. 신념과 교리라는 이름 아래 자칫 맹목적인 확신에 빠지기 쉬운 종교 지도자들의 세계를 배경으로, 오히려 의심하고 고뇌하는 인간적인 모습이 진정한 리더십의 자질일 수 있음을 시사합니다.
"I am (still) who God made" - 존재 자체로의 긍정
영화는 후반부, 예상치 못한 인물이 교황으로 선출되면서 또 다른 질문을 던집니다. 새로운 교황으로 선출된 베니테스 추기경(카를로스 디에즈 분)에게는 남들이 모르는 비밀이 있었습니다. 그가 인터섹스(intersex)라는 사실이 밝혀지자 로렌스 추기경은 당혹감을 감추지 못합니다. 하지만 베니테스 추기경은 담담하게 말합니다. "I am (still) who God made." (나는 신이 만든 모습 그대로입니다.)
이 장면에서 저는 말 그대로 울컥했습니다. 세상의 기준이나 편견, 혹은 스스로의 잣대로 자신의 부족함이나 다름을 재단하는 것이 아니라, '신이 만든 모습 그대로의 나'를 온전히 받아들이는 그의 모습은 깊은 감동을 주었습니다. 이는 비단 종교적인 의미를 넘어, 우리 각자가 가진 고유한 모습과 삶의 이유를 긍정하는 보편적인 메시지로 다가왔습니다. 전쟁과 폭력 앞에서 "전쟁은 해서는 안 된다"고 단호하게 말하며 평화와 미래를 향한 의지를 보여준 그의 모습은, 악을 악으로 맞서는 대신 더 나은 가치를 추구해야 한다는 깨달음을 주었습니다.
영화가 남긴 질문과 삶의 힌트
영화는 저에게 여러 질문을 남겼습니다.
- 나는 신(혹은 나 자신)이 만든 지금의 내 모습과 삶을 감사하고 사랑하며 살고 있는가?
- 모두가 의심 없이 '성공'이나 '최고'를 이야기할 때, 나는 한 걸음 물러서서 의심할 여유를 가지고 있는가? 만약 그렇다면, 그 의심을 표현하고 행동으로 옮길 용기는 어떻게 얻을 수 있을까?
- 과거에 얽매이지 않고 미래를 향해 나아가려 했던 영화 속 인물들처럼, 나의 삶과 커리어 역시 더 나은 미래를 향해 나아가고 있는가?
'콘클라베'는 단순히 종교 영화나 정치 스릴러를 넘어, 인간 내면의 복잡한 심리와 신념, 그리고 우리가 지향해야 할 가치에 대해 깊이 생각하게 만드는 작품이었습니다. 영화가 던진 힌트처럼, 있는 그대로의 나를 사랑하고, 때로는 약점처럼 보이는 나의 다름이 오히려 강점이 될 수 있음을 기억해야겠습니다. 그리고 마음속에 피어나는 의심들을 덮어두기보다는, 탐구하는 자세로 더 나은 미래를 위해 변화를 만들어갈 용기를 가져야겠습니다.
정치적 암투와 인간적 고뇌, 그리고 신앙의 본질에 대한 깊이 있는 성찰을 아름다운 영상과 함께 경험하고 싶다면, 영화 '콘클라베'를 강력히 추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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